티스토리 뷰
목차
고종황제, 무능의 아이콘인가? -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대한민국 역사에서 고종 황제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뭅니다.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는 1910년까지,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나라를 잃은 무능한 군주로 기억하곤 합니다. 을미사변, 아관파천, 헤이그 특사 파견, 그리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까지.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고종은 주로 무력하고 외세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져 왔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이러한 프레임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 인식 깊숙이 박혀 있었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종을 단순히 '무능의 아이콘'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요?
'무능한 군주'라는 오해, 어디서 왔을까? 깊이 있는 해부
고종 황제에게 '무능하다'는 딱지가 붙게 된 배경은 복합적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재위했던 시기가 너무나도 가혹했기 때문입니다. 고종의 즉위 시기는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침탈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제국주의 시대의 절정이었습니다. 조선은 '은둔의 나라'에서 벗어나 서양 문물과 접하게 되었지만, 이는 곧 침략의 파고를 의미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하며 팽창주의적 야욕을 드러냈고, 청나라는 여전히 중화사상에 갇혀 있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죠. 여기에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이권 다툼에 뛰어들며 조선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라가 결국 망국의 길을 걸었으니, 최고 통치자였던 고종이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왕이 무능했겠지'라는 단순 논리가 지배적이었던 것이죠.
더욱이, 일제는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종을 비롯한 조선 왕조 전체를 무능하고 부패한 존재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어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논리를 퍼뜨려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사실, 냉혹한 국제 정세의 논리로 본다면 일본의 이러한 주장이 어느 정도 현실에 부합하는 면도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힘이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라는 말이 가장 적확하게 어울리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오직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국력만이 외교의 실질적인 힘이었습니다. 논리나 명분은 부족한데 무언가의 이권을 가져야 한다면, "함포외교"라는 이름의 무력 압박을 통해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어떠했을까요?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나라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냉혹한 국제 현실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갖추기보다 청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명분, 그리고 유교적 이치만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던 사대부와 유림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좀먹고 있었으며, 상대방이 문서나 말로 약속하면 그것이 전부인 양 믿고 의기양양해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역량을 키우기보다는, 러시아나 미국, 청나라와 같은 강대국들의 비호에 기대어 허울좋은 '독립국가'라는 명분에만 목매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이러한 대한제국의 현실을 간파하고, 대한제국 시기의 자주적인 노력들을 철저히 폄하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근대화 모델만이 올바른 길이며, 자신들의 침략이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도움'이었다는 식민사관을 끊임없이 주입한 것이죠.
이러한 식민사관이 해방 이후에도 상당 부분 잔존하면서,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고, 그의 다각적인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종은 결코 손 놓고 주저앉아만 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어떻게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려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군주였습니다.
풍전등화의 시대, 고종의 고뇌와 필사적인 대응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는 1910년까지의 시기는 조선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폐해와 삼정의 문란으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고,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며 사회적 불안이 극에 달했습니다. 위정척사와 개화파의 대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변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치적 혼란도 끊이지 않았죠.
밖으로는 운요호 사건, 갑신정변 이후 청일 양국의 조선 내정 간섭 심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강대국들의 대리전쟁터가 된 한반도 등, 조선은 자주성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벼랑 끝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종은 국내외의 상상할 수 없는 압력 속에서 통치해야 했습니다. 그가 단독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였다고 해도 이러한 혼란을 완벽하게 수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파고 속에서 고종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했고, 때로는 청과 일본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나약함의 발로가 아니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이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자 현실적인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죠. 아관파천 역시 당시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외교적 활로를 모색하려 했던 고종의 필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압력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고종을 단순히 '망국의 군주'라는 좁은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가 처했던 시대적 한계와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그의 노력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다음 편부터는 고종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추진했던 구체적인 '몸부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우리가 몰랐던 그의 진짜 얼굴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종이 국가 안보를 위해 은밀하게 만들었던 **'조선판 007, 고종의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6년 최저임금, 10,360원으로 결정! (1) | 2025.07.11 |
---|---|
조선판 007, 고종의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1) | 2025.07.11 |
방랑마귀의 역사 다시보기 (0) | 2025.07.11 |
🎮 게임 러버들 모여라! 2025 인천 게임 페스티벌 (1) | 2025.07.10 |
갑자기 쏟아지는 비, 이제는 '기습폭우'에 대비해야 할 때! (4) | 202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