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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마지막 외침: 헤이그 특사 파견과 국제 외교의 좌절 (시리즈 5편)
안녕하세요, 방랑마귀입니다. 우리는 앞선 이야기들을 통해 고종 황제가 '무능한 군주'라는 오명 뒤에 숨겨진, 조국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들을 엿보았습니다.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창설하여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은밀히 국권을 수호하려 했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저항인 의병을 지원하며 나아가 황실 차원의 의군 창립을 도모하는 등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려 했습니다.
또한 광무개혁이라는 야심 찬 계획 아래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군사,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서 눈부신 노력을 기울였죠. 그의 이러한 노력들은 쇠퇴하는 국력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군주의 필사적인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더욱 가혹해졌습니다. 일본은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한 뒤, '한국 보호'라는 명목으로 침략을 노골화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 헌병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고종 황제의 비준 없이 강제 체결된 불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고,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인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고, 절망의 그림자가 한반도를 뒤덮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국제사회에 걸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모든 권한과 자존심을 걸고, 국제 정의에 호소하고자 했습니다.
오늘은 고종 황제의 비극적이지만 강렬했던 마지막 외교적 '몸부림', 바로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국제법에 호소하다: 고종의 마지막 승부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을사늑약이 고종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체결된 불법적인 조약임을 세상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종이 선택한 최후의 수단은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1899년 제1차 회의에 이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열 예정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전 세계의 평화와 분쟁 해결, 그리고 국제법 확립을 논의하는 장이었으며, 약소국들의 권리와 평화를 논하는 중요한 국제 회의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고종은 이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호소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박탈했다고 주장하며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황제가 직접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는 극히 위험하고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만약 발각된다면 일본의 더욱 가혹하고 잔인한 보복을 피할 수 없는, 그야말로 황제의 마지막 승부수이자 명운을 건 외교전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남겨진 대한제국의 절박한 상황을 국제사회가 외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 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리고 베일에 싸인 지원자들
고종은 목숨을 걸고 대한제국의 명운을 짊어질 세 명의 특사를 신중하게 선정했습니다. 먼저 **이준(李儁)**은 법관 양성소 출신의 검사이자 열정적인 애국지사로, 대한제국의 법률적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확고한 신념과 뛰어난 논리로 조약의 불법성을 설파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이상설(李相卨)**은 독립운동가이자 북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이미 해외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고 망명 정부 수립을 추진할 정도로 국제 정세에 밝고 해외 활동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위종(李瑋鍾)**은 이범진 러시아 공사의 아들로,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젊은 외교관이었으며, 유창한 외국어로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직접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이 세 특사는 각자의 강점을 바탕으로 고종의 밀명을 수행할 최적의 조합이었습니다.
이들은 고종 황제로부터 직접 받은 **'특임전권위임장(特任全權委任狀)'**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를 떠나 헤이그로 향했습니다.
이 위임장에는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어진 불법적인 조약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며, 대한제국은 여전히 독립 주권 국가이다"**라는 고종 황제의 분명하고 단호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특사 일행은 당시 일본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야 했으며, 장거리 여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여비와 숙박비 등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등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종은 단순히 세 명의 특사만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사들의 안전과 활동을 돕기 위해 최소 10명 이상의 비밀 요원들을 추가로 파견하여 특사들을 지원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제국익문사 출신 요원들이거나 황실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독립운동가들로 추정되며, 특사들의 여정을 원활하게 하고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듯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에 자신의 모든 역량과 황실의 자금까지 총동원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혹한 국제정세와 좌절된 외교: 헤이그의 비극적 결말
그러나 고종의 간절한 외침은 냉혹한 국제 현실의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국제사회, 특히 서구 열강들은 이미 일본과 동아시아에서의 이권 분할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로 인해 더 이상 대한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약소국의 주권보다는 자국의 이해관계가 우선시되는 제국주의 시대의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헤이그 평화회의장 측은 일본의 거센 항의와 압력으로 인해 대한제국 특사들에게 공식적으로 회의에 참석하거나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외교권을 박탈당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에 좌절하지 않은 특사들은 회의장 밖에서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호소문(Appeal to the Nations)**을 배포하고, 국제 언론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제국의 비참한 상황과 고종 황제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이위종은 유창한 외국어로 기자들 앞에서 대한제국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며 큰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앞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현실 외교'라는 이름 아래 약소국의 목소리는 그저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결국 이준 열사는 헤이그 현지에서 통한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으며 (혹은 병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의 죽음이 대한제국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각국을 돌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 속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고종의 폐위와 마지막 불씨의 확산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한 황제 차원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불순한 행위'로 간주하고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켰고,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국제 외교마저 좌절되고, 심지어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긴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파견은 결코 무의미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는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과 용기를 주어 항일 투쟁의 불씨를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마지막 외침은 비록 현실에서는 좌절되었으나, 그 정신은 후대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숭고한 정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이는 훗날 대한민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고종 황제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그가 펼쳤던 '몸부림'들이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남겼는지 종합적으로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역사의 렌즈로 본 고종: 왜 우리는 그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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