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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렌즈로 본 고종: 왜 우리는 그를 다시 보아야 하는가?
안녕하세요, 방랑마귀입니다. 우리는 지난 다섯 편의 이야기에 걸쳐 고종 황제에 대한 오랜 오해를 벗겨내고,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쳤던 다각적인 '몸부림'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해왔습니다.
'무능한 군주'라는 낙인 뒤에 가려져 있던 그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노력들을 함께 되짚어본 시간이었죠.
오늘은 대장정의 마지막 이야기로, 고종 황제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그가 추진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를 남겼으며, 왜 우리가 그를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재평가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고종의 '몸부림', 그의 노력들은 정말 헛된 것이었을까?
고종은 재위 기간 내내 내우외환에 시달렸습니다. 안으로는 봉건적인 사상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자비한 침략과 이권 다툼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비극적인 시대의 무게를 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종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했기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단순한 결론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즈를 통해 살펴본 그의 행적은 이러한 통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통한 정보전: 그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현대적인 정보 수집 방식인 비밀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이는 고종이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고, 침략의 의도를 간파하려 했던 치밀한 노력이었습니다. 비록 그 존재는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황권 수호에 활용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결코 구시대적이지 않았습니다.
- 의병과 의군 창립 시도: 백성들의 자발적인 항일 투쟁이었던 의병에 대해 고종은 단순히 방관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관파천 시기부터 그는 밀지를 통해 의병 봉기를 독려하고, 나아가 황실 차원의 '의군'을 창설하여 민중의 힘을 조직적인 항일 역량으로 통합하려 했습니다. 최근 공개된 민긍호 의병장에게 하사된 황제어새 밀지는 고종이 의병을 단순히 '백성의 저항'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군대'로 편입시켜 자주국방을 이루려 했던 그의 강력한 의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 '광무개혁'을 통한 근대화 추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대한국국제, 원수부), 군대를 대폭 증강하며(병력 3만 명 증강, 신식 무기 도입), 근대적 토지 제도(지계아문)와 산업 육성(대한천일은행, 한성전기회사)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 했습니다. 또한, 육군무관학교, 외국어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당시 아시아의 어떤 국가도 시도하기 어려웠던 자주적인 근대화의 꿈이었으며, 그 나름대로의 비전과 실행력이 뒷받침된 것이었습니다.
-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한 마지막 외교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양심에 호소하고자 목숨을 걸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특사와 그들을 도왔던 수많은 비밀 요원들의 활약은, 비록 냉혹한 국제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지만,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비극적이지만 강렬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며 항일 투쟁의 중요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고종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고종의 노력들이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실패를 단순히 '무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화하는 오류이며, 나아가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너무나도 가볍게 평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실패는 단순히 개인적인 역량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조선이 처했던 시대적 한계, 즉 제국주의 열강들이 전 세계를 약육강식의 논리로 지배하던 냉혹한 국제 정세와, 내부 기득권 세력의 완고한 저항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종은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국제 정세의 흐름을 빠르게 읽으려 노력하고,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던 인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의 판단이 항상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서구 열강의 이중적인 태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지 못했거나, 국내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간의 갈등을 효율적으로 조정하지 못한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상황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서양 문물을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이기에는 내부의 반발과 외부의 견제가 너무 거셌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선 사람이 발버둥 치듯, 고종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했고,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것이죠.
저는 그를 '비극적인 시대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저항자'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종을 철저히 폄하하고 무능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기에 우리가 도와줬다'는 식민사관의 논리를 퍼뜨리기 위해 고종의 모든 노력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식민사관의 잔재가 해방 이후에도 상당 부분 남아 우리의 역사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는 일본이 심어놓은 렌즈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자주적인 관점에서 고종의 노력과 한계를 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그의 광무개혁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이는 서구의 것을 무작정 모방하기보다 '구본신참'이라는 주체적인 원칙 아래 대한제국만의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고종의 비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주도적으로 국가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노력이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또한, 고종은 민중의 항일 저항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황실 차원에서 이를 지원하고 조직화하려 했습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 역시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신적 기반이 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은 훗날 상해 임시정부의 정보기관, 무장 투쟁, 외교 활동 등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삶과 정책은 선과 악, 성공과 실패로 명확히 나눌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의 한계와 좌절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놓였던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서 발휘했던 주체적인 노력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역사를 더욱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인물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교훈을 얻는 중요한 과정이 됩니다. 단순히 '무능했다'고 치부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의 모든 한계를 짊어진 채,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가장 많이 노력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방랑마귀가 시작한 이 '새로운 역사 읽기'는 단순히 한 인물을 찬양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면모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주 독립의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결코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질 수 없는 시대적 무게 속에 있었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의 '몸부림'은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 속에 담긴 자주 독립의 염원만큼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시리즈가 독자 여러분에게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단면을 들여다보고, 고종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선조들의 노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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