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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믿었던 황제? - 고종과 의병, 의군 창립의 숨은 이야기
안녕하세요, 방랑마귀입니다. 지난 두 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능한 군주'라는 오해 속에 갇혀 있던 고종 황제가 사실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군주였음을 살펴봤습니다. 특히 베일에 싸인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통해 얼마나 은밀하고 치밀하게 국권 수호를 시도했는지 엿볼 수 있었죠.
이번 글은 고종의 또 다른 '몸부림'이자, 민족의 힘을 결집하려 했던 더욱 직접적인 노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고종 황제와 의병(義兵), 그리고 황실 차원의 의군(義軍) 창립 시도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과연 고종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항일 투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원했을까요?
민중의 저항, 의병의 봉기: 황실은 정말 무관했을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조선의 국권이 흔들리자 민중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은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을 촉발시켰습니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명령은 단순한 서양 문물의 도입을 넘어, 백성들의 정체성과 정신적 지주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생들과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의 기치를 내걸고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을사의병'**이 다시 전국을 뒤덮었고, 1907년에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며 더욱 조직적이고 강력한 **'정미의병'**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백성들의 자발적이고 숭고한 저항이자, 역사의 기록에 길이 남을 애국 활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병을 '민중 주도의 자발적 항일 투쟁'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과연 황실, 즉 고종 황제는 이러한 의병의 봉기를 마냥 방관하고 있었을까요? 식민사관은 고종이 무능했기에 백성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종의 예상 밖의 움직임들이 포착됩니다. 그는 결코 민중의 저항에 무관심하거나 등 돌린 채 무력하게 앉아만 있지 않았습니다.
고종의 은밀한 지시: 의군(義軍) 창립 도모와 의병 지원의 명확한 증거들
고종은 민중의 의병 활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이를 은밀하게 독려하고 지원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수동적인 군주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 민족의 힘을 모아 국권을 수호하려 했던 주체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발굴되거나 재조명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을 통해 더욱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관파천 시기(1896년)의 밀지 발송: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도, 전국 각지의 유림과 관료들에게 비밀리에 밀사(密使)를 보내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이 시기의 밀지는 단순한 격려 수준을 넘어, 의병 봉기를 황실 차원에서 인정하고 나아가 이를 조직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매천야록』, 『대한계년사』 등 당대 야사나 기록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며, 황제 스스로가 의병 활동의 불씨를 지폈음을 암시합니다. 황제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항거가 국권을 되찾는 중요한 힘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 을사늑약(1905년) 이후의 의병 지원과 황제 직속 의병 양성 계획: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고종은 국내 각지의 의병진에 밀지를 보내 항일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하는 활동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특히 경북 영천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한 정환직 의병장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고종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단순히 몇몇 의병장에게만 밀지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고종은 황실과 연결된 측근들을 통해 의병 부대에 대한 자금 지원과 물자 조달까지도 은밀히 추진했습니다. 이는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열악한 상황에서 무장 투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 황실 차원의 '의군(義軍)' 창립 도모: 고종은 단순한 의병 지원을 넘어, 황제 직속의 '의군'을 창설하여 민중의 의병 활동을 국가적 차원의 조직적인 항일 세력으로 편입시키려는 원대한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 역량을 국방력 강화에 활용하려는 고종의 주체적인 구상이었습니다. 이는 고종이 무너져가는 왕조의 위상을 인식하고, 민중의 힘을 국방력의 한 축으로 삼으려 했던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국고에서 막대한 자금을 할애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고종이 단순히 말로만 의병을 독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민긍호 의병장에게 하사된 황제어새 밀지 (2025년 공개): 가장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는 바로 2025년에 최초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된 **'대한제국 진위대 창의사령부 임명 황실 밀지'**입니다. 이 문서는 1907년 9월 5일 고종 황제가 민긍호 의병장에게 직접 황제어새(密旨에 사용한 옥새) 직인이 찍힌 칙명을 내린 것으로, 민긍호를 정3품 통정대부로 특별 승급하며 '대한제국 진위대 창의사령부 대장'으로 봉무할 것을 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고종이 일제의 강압적인 군대해산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을 단순히 인정한 것을 넘어, 직접 지원하고 자신의 휘하에 편입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이고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밀지는 의친왕기념사업회 수장고에 보관되어 왔으며, 고종의 둘째 아들이자 육군 부장이었던 의친왕이 제국익문사 요원을 통해 전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고종은 황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병을 국가적인 차원의 저항군으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고종의 시도들은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방해, 그리고 대한제국 자체의 내부 역량 한계로 인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분명했습니다. 고종은 황실과 관군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민중의 애국심과 투쟁 의지를 국가 수호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를 '무능한 군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백성 속에 스며든 황제의 꿈과 독립의 씨앗
고종의 의군 창립 도모와 의병 지원 노력은 결국 민중의 자발적인 항일 투쟁과 맞물려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황제가 백성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독립의 불씨를 지피려 했던 고종과 민중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훗날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숨겨진 노력이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져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종 황제가 국력 신장을 위해 추진했던 또 다른 근대화 개혁, **'자주 독립을 위한 꿈: 고종의 광무개혁, 그 빛과 그림자'**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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